펠릭스 호세
1. 소개
前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외국인 선수이다.'''난 부산갈매기의 가사는 모른다. 하지만 노랫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2007년 KBSN과의 인터뷰 中[2]
롯데 팬들은 그를 '''검은 갈매기'''라 불렀다.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롯데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마해영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시원하고 화끈한 성격, 그리고 그 성격에 걸맞는 호쾌한 장타 능력까지, 이른바 '''부산 스타일'''이 호세가 롯데 팬들에게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수 있었던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를 떠난 이후 멕시칸 리그에서 '''금지약물 복용'''이 적발되는 바람에 그동안 그가 거둔 성적의 신뢰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게다가 적발 시기가 한국프로야구를 떠난 지 '''약 2개월 후''' 였던지라(출처) 한국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동안 약을 했던거 아닌지 의심할 여지가 충분히 있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그 이후에 호세는 한국에서 시구까지 하는 등,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뛰었던 또 다른 도핑 전과범인 다니엘 리오스에 비해 비난받는 정도가 덜한데, 리오스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KBO MVP를 수상한지 1년도 안 되어 도핑적발이 된 반면, 호세는 비록 도핑이 한국프로야구를 떠난 후 2개월이긴 해도 전성기 당시와는 꽤 시간차가 있었으며 MVP를 수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리오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프로야구에서 도핑이 걸린 반면 호세는 멕시코리그에서 걸린 지라 도핑 적발사실 자체가 잘 안 알려진 영향도 있다. 만약 2001년 호세가 배영수 폭행사건을 안 일으키고 MVP를 받았다면 호세도 꽤 논란이 되었을지도?
2. 선수 경력
2.1. 한국에 오기 전
1984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해 1988년 데뷔했으며 1990년 오클랜드에서 풀타임 우익수로 데뷔했다가 윌리 맥기 트레이드[3] 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해서 윌리 맥기의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고 1991년부터 주전 우익수로 나섰다. 그리고 1991년 세인트루이스의 5번타자로 3할 타격에 많은 2루타를 쳐내며 올스타에 뽑혔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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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시즌을 마치고 캔자스시티 로열즈로 트레이드되어 우익수로 뛰었지만 점점 기록을 내지 못하며 1995년 시즌 이후로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뛸 수 없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는 나름대로 10홈런 가량과 15~20개의 도루정도는 기록했었으며, 커리어하이 3할 1푼정도도 쳐줄 정도로 나름대로 인지도도 있었던 선수였었는데, 1995년 이후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을 떠나 멕시칸 리그와 독립리그에서 활동했다.
2.2.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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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로 마이클 길포일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시범경기에서도 타격감을 과시하더니 5월 9일 KBO 리그 통산 10,000번째 홈런을 친데 이어 5월 29일에는 좌-우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최초로 좌-우타석에서 모두 홈런을 친 선수가 되기도 했다.[5] 6월 20, 21일 한화전에선 두 경기 연속 만루홈런을 첬다. 호세가 이렇게 맹활약을 펼치자 사직구장에는 '''호세 열풍'''이 불 정도로 그의 인기는 높았다.
호세는 1999 시즌을 '''타율 .327, 151안타, 36홈런, 122타점'''으로 마무리하며 박정태-마해영과 함께 일명 박마호 트리오로 롯데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 진출 일등공신으로 뽑혔다,
특히 1999년 기적적인 7차전에 묻혔지만 플레이오프 5차전은 호세가 가장 만화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경기였다. 삼성이 1차전과 2차전 승리후, 4차전까지 이기며 롯데가 1승 3패로 1경기만 더 지면 끝나는 상황. 그리고 맞이한 5차전에서 롯데가 5:3으로 밀리는 상태로 9회말을 맞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마무리였던 애니콜 임창용을 맞아 롯데는 2루타와 볼넷으로 무사 1, 2루의 찬스를 만들었으나 4번타자 마해영이 삼진을 당하고 호세가 타석에 들어섰다.[6] 벤치에서는 호세를 고의사구는 아니지만 볼로 빼면서 안되면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음타자를 상대하자는 사인을 내보내게 된다. 임창용의 공이 2볼까지의 상황이 가게 되고 다음 공도 볼이었다. 기다리면 걸어 나갈수 있는데도, 호세는 헛스윙을 하였고 다음 공에도 헛스윙을 하였다.
마치 승부를 보자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승부욕 하면 뒤지지 않는 임창용은 스트라이크 존에 직구를 쏘아 던지지만 호세가 그대로 받아쳐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플레이오프에서의 '''역전 끝내기 홈런'''[7] 을 날리며 6:5 승리를 이끌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사직 팬들의 열광은 덤. 벼랑끝 상황에서 롯데를 살린 이 홈런으로 결국 롯데는 6, 7차전까지 3연속으로 6:5로 이기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3.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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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시즌 후 롯데에서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재진입을 노리며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였다가, 그다지 많이 출장하지 못하며 2001년에 롯데로 복귀했다.
복귀 후 더욱 뜨거워진 호세는 2001년 9월 18일 마산야구장에서 벌어진 배영수와의 벤치 클리어링으로 잔여경기 출장 정지 처분[8] 을 받았음에도, '''타격 3위, 출루율 및 장타율 1위, 홈런 2위, 타점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때 호세의 기량은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역대 단일 시즌 최다 기록인 볼넷 '''127개'''은 상대 투수들이 그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덕분에 출루율 '''0.503'''을 기록, 프로야구 원년 백인천의 0.502를 경신하여 역대 최고 출루율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 롯데 자이언츠는 호세만 야구한다라고 까였으며, 호세만 상대 안하고 다른 선수 상대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만약 호세가 배영수를 폭행하지 않았다면 그 해 MVP는 호세가 되었을것이고 롯데가 꼴찌로 다시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당시 호세는 바로 전년도 양키스에서 20경기 타출장 .241 .281 .345에 1홈런, 마이너 AAA에서 타출장 .310 .379 .567 OPS .901에 11홈런이라는 전형적인 AAAA선수급 성적을 기록하고 왔는데, AAA에서보다 더 압도적인 성적으로 완전히 KBO리그를 파괴해 버린 것을 보면 지금보다도 더 MLB와의 리그 수준차가 심했음을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지표.
시즌 후 롯데는 호세와 함께하기를 원했지만 호세는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키며 롯데를 넘어 '''KBO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는 곧 영구제명으로 이어졌다. 만약 이중계약만 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암흑기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2년과 2003년, 호세는 애리조나 소속의 마이너리그 팀에서 활약했고 2003 시즌에는 약물 복용 소식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KBO 측에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롯데는 2006 시즌에 다시 호세를 영입했다.
2.4. 롯데 자이언츠 3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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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시즌 초반에 잠시 부진하다가 6월부터 대폭발하며 이대호와 홈런부문 1위를 놓고 경쟁했고 홈런 2위, 타점 4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9] 시즌 후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캠프 막바지에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며 결국 5월 초에 퇴출되고 말았다.
이전부터 방출설이 계속 나돌았고, 부진도 심했기에 대부분의 롯데팬들이 호세와의 작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호세는 롯데에 남기를 희망하며, 자신이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 했으나 부상과 노쇠가 겹치며 떨어진 배트스피드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뜬금없이 홈런을 하나 치는데, 바로 그 날 방출이 공식 발표된다. 마지막 날 때린 홈런은 호세의 KBO통산 99호 홈런(플레이오프 포함). 자신의 등번호와 같은 숫자다. 만약 이중계약을 하지않았거나 호세가 재계약에 응했다면 100홈런이상은 쉽게 넘겼을 것이다.
2.5. 롯데 방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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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방출 이후 멕시코 리그로 갔으나, 이번에는 '''약물 복용이 들통나서 방출'''[10] , 캐나다 캘거리의 독립리그 팀에서 뛰다가 2009년 시즌에는 Northern League 라는 독립리그에 있는 Schaumburg Flyers 라는 팀에서 뛰었다. 09시즌에 타율 9위, 출루율 2위를 기록했다.
3.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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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아재: 호세야! 출출하제? 여 라면 한사발 묵으라!!
펠릭스 호세: 대구아재요! 고맙심더! 방망이 좀 가가소!
샤다라빠의 만화에서 패러디 된 대사.
KBS 스포츠에서의 호세 사건사고 하이라이트.
역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1999년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의 플레이오프 7차전 때 호세가 홈런을 친 이후 정신나간 삼리건 관중들이 컵라면 국물을 비롯한 여러가지 오물을 경기장에 투척했고, 열받은 호세는 야구 방망이를 대구 관중들에게 던졌다. 이 사건은 10년 후, 훌리건의 '''레이저 포인터''' 사건을 비호할 때 인용된다. 자세한 사건의 전말은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항목의 동영상 참조.
물론 호세는 퇴장을 당하고 선수단도 경기를 거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롯데는 연장 접전 끝에 삼성을 무너뜨리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호세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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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인터뷰상으로 많이 해 봤었는데 방송으로 처음 하는데 호세 선수랑 제가 다들 참교육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떻게 호세 선수하고 사건이 있어서 선수생활하면서 그때부터 조금 잘하게 됐어요. 그래서 팬분들께서 참교육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도 그 부분을 인정을 합니다.
그 외에도 2001년 '''마산''' 삼성전에서 배영수가 자신에게 거의 몸에 맞는 공을 던져 볼넷으로 거르고 후속 타자로 나온 얀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자 1루에서 빛의 속도로 달려와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린 사건[13] 이라든가, 헤이 영쑤![14] 2006년 문학에서 SK 와이번스 신승현과의 결투(?)에서 보여준 일련의 행동(이 과정에서 최태원 코치와 공필성 코치의 '''살신성인'''이 나중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도 호세의 불같은 성격을 뒷받침해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그가 타 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벌인 일대의 '''호세 무쌍'''은 아직도 야구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배영수에게 죽빵을 날린 이 사건 이후 배영수의 에이스 포텐이 터진 사실이 주목받으면서 배영수에게 날린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야갤에서 '''참교육'''이라는 찬양(?)을 받게 된다. 더욱이 호세의 벤클에서 달아난 신승현이 이후 추락하면서 호세는 야갤에서 완전히 '''참교육자'''가 되어 버렸다.(...)
다만 당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배영수의 성적이 엉망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이미 배영수는 사건이 발생한 2001년에도 13승을 거둔 떠오르는 에이스였다. 오히려 그 다음 해인 2002년에는 겨우 6승을 거두며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2003년부터 겨우 원래 실력을 나타냈다. 호세가 저 당시 그 정도로 화를 낸 것도 '배영수와 같은 선수가 저렇게 몸에 맞는 공을 실수로 던질 리가 없다. 저건 명백한 고의이다'란 생각 때문이었다.
훗날 2021년, 베이스볼 코리아와의 화상 인터뷰를 통해 해당 사건과 관련해 질문을 받았다.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 그 당시 KBO 리그는 이러한 불문율에 익숙하지 않은 프로 리그였었다고 회상했다.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당시 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의 KBO 리그는 많이 발전했고 세련된 야구를 하기 때문에 그 때보다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배영수에 대해서는 그 당시 실력이 좋은 투수였다고 회상하면서 구속도 빠르고 좋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던질수 있던 투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영수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투수였다고 말했다. 기자가 재미삼아 '헤이 영수 돈두댓'을 해줄수 있냐고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기자가 부탁한 대로 말해 주면서 웃으면서 끝냈다.
이 사건으로 호세가 출장 정지를 당하며 시즌을 마감하자 우용득 당시 감독 대행은 더 이상 가용할 수 없게 된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당시 타자 전향 훈련을 받고 있었던 어느 신인을 호세 대신 1군에 처음으로 등록하는데, 그 선수가 바로 이대호다.
최고의 시즌인 2001년에는 배영수 폭행 사건 때문에 고작 117게임(499타석)에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0.335, 36홈런, 102타점, '''OPS 1.198(!)''', '''출루율 0.503'''의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해 기록한 OPS와 출루율은 각각 KBO 역사상 단일시즌 3위(1위는 에릭 테임즈 의 1.288, 2위는 원년 백인천의 1.237), 1위의 기록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폭행 사건으로 인해 MVP도 KBO 골든글러브도 받지 못했다. 참고로 당시 지명타자로 골든 글러브를 받은 양준혁과 호세의 스탯을 비교하자면
양준혁 : '''타율 0.355''' / 출루율 0.449 / 장타율 0.510 / OPS 0.959 / 14홈런 / 92타점 / '''12도루''' / 80볼넷
호세 : 타율 0.335 / '''출루율 0.503''' / '''장타율 0.695''' / '''OPS 1.198''' / '''36홈런''' / '''102타점''' / 7도루 / '''127볼넷'''
양준혁이 못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타율, 도루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호세가 우월하기 때문에 폭행 사건의 영향+외국인 차별로 골글을 못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다만 나중에 약물 복용이 밝혀지면서 위 스탯이 원래 실력으로 낸 성적이 맞는지 신뢰할 수 없게 된 게 문제.
다만 이런 불같은 성격과 그라운드 위에서의 거친 이미지와는 달리, 롯데 팬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정성스럽게 사인해 주고 놀아줄 정도로 친근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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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던 호세는 '하리수 문신'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해 8월 한창 인기를 끌던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에 반해 팔뚝에 '사랑해 하리수 호세'라고 새긴적도 있었다. 사실은 문신이 아니라 그 당시 화제였던 하리수의 이름을 롯데 선수들이 매직으로 쓴 장난이다. 펠릭스 호세 → 하리수 호세.. 근데 기자들이 하리수 문신을 했다고 오버...
호세가 홈런을 치거나 롯데가 승리를 거두는 날에 부산광역시의 유흥가는 매우 떠들석해지며, 일명 "호세 효과"라 불리는 유흥주점을 중점으로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유명한 집창촌을 몇 바퀴 돌면서 사람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손을 흔들며 보답하기도 했단다. 훗날 본인이 회고하기를 '''부산에서 내 돈 내고 뭐 사먹은 적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부산에는 호세한의원이라는 한의원이 있다. '''진짜 있고, 사직 야구장 옆에 있으며 어원은 이 항목의 인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받은 상들은 잃어버리거나 도난 당했다고 한다.[15]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원정 유니폼 하의가 회색이었는데 원래 유니폼 대신 2000년 입었던 뉴욕 양키스의 원정 유니폼 하의를 양해를 얻어 입고 뛰었다.
롯데에 있었을 적에 조경환은 호세가 롯데를 떠난 후 급격하게 성적 부진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2002년 7월에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메이저리거도 겪었고, 대한민국에서도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어가서인지 조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부러움을 받던 인물이기도 했다. 2000년 초반 그가 대한민국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기자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그의 집을 취재했었는데, 200평이 넘는 넓은 집과 역시 넓은 마당, 수영장까지 갖추고 자동차도 4대나 있으며 경비원과 메이드들까지 고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롯데 시절 후배로 온 기론도 그래서 호세를 우상으로 여기고 잘 따른 거라고, 고향 선배에 메이저리그와 한국에서 성공했으니 우상일 만하다.
자식으로 도미닉 호세가 있으며. 1993년생으로 플로리다 주에 있는 보카랜턴 고등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2011년에 열린 신인 드래프트 때 LA 에인절스가 15라운드(총 465위)에서 지명했지만, 입단을 거절한 후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뉴욕 양키스에 24라운드에서 지명했다. 주 포지션은 외야수. 이후 2016년에 선수생활은 은퇴하고 2019년 에이전시 컴퍼니에서 근무하다 다시 BOA은행으로 이직한 듯 프로필 참조
2013년 6월 26일에 열리는 롯데 자이언츠의 1999 이벤트를 기념해 사직 야구장을 방문, 시구를 한다는 카더라가 떠돌았다.넥슨 프로야구마스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 알려지면서 더욱 팬들의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부산MBC 야구해설위원이 아직 확정 아니다라고 글을 남기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증폭하는 중. 그리고 6월 26일 시구를 위해 입국한다고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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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영쑤! 아임 백! 롱 타임 노 씨!''' 야구팬들은 참교육을 시킬 아이들이 많아졌다고 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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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색이 살구색 일 뿐이다.
최효석(둠씨) 부산MBC 야구 해설위원에 의하면 '''배영수와 신승현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링크 꿈은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한뒤 감독이 되는거라고 한다.
그리고 2019년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가 배영수와 함께 두산 베어스로 오게 되어 원조 호세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그는 초반부터 안타수 단독선두를 질주하면서 안우진을 상대로 진짜 참교육을 시전하였다.
정수근이 박명환의 방송에서 회고하기를, 팀원에게는 천사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일례로 호세가 지각을 자주 하자 형들이 '저 씨발새끼 지각하지 말고 말 좀 잘 들으라고 해' 라고 하여 정수근이 빠따 들고 그대로 욕을 하자 어버버하며 알았다고 했다고 한다(...). [16]
전지훈련 도중 온천을 들렀다가 한자를 읽지 못하여 여탕으로 잘못 들어간 에피소드도 있다.
2019년 김평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력분석코치가 밝힌 바에 의하면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타격코치로 일하는 중이라고 한다.
한국 프로야구계에서는 드물게 팬 서비스가 굉장히 좋았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롯데팬들이 호세를 아직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
2021년 2월4일 베이스볼코리아에 따르면 두산의 최고의 외국인선수였던 타이론 우즈와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2007시즌 도중에 방출 당했다.[2] 아쉽게도 그는 이 해에 방출당했다.[3] 이 트레이드가 유명한 것은, NL소속 세인트루이스에서 AL소속 오클랜드로 리그 이동을 했는데 그해 내셔널리그 타격왕을 윌리 맥기가 차지했기 때문이다.[4] 여담으로, 1991년 MLB 올스타전에 훌리오 프랑코도 뽑혔다.[5] 후에 최기문, 서동욱, 조쉬벨, 로하스도 좌-우타석에서 홈런을 쳤다.[6] 당시 호세가 심각한 타격부진에 빠져있어 호세가 5번을 맡고 있었다.[7] 최초 플레이오프 끝내기 홈런은 1996년 쌍방울의 박철우의 것.[8] 호세가 출장 정지를 받고 시즌을 마감하자 우용득 감독 대행은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그 해 갓 입단한 신인 우타자를 1군에 처음 올리는데, 그 선수가 바로 롯데 최고의 우타자 되시는 분이다. 사실상 호세 때문에 1군에 데뷔하게 된 것.[9] 참고로 2006년은 21세기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었다.[10] 선수 본인 말로는 2007년 아킬레스건 치료 과정에서 스테로이드가 쓰여서 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아킬레스건염 치료로 고농도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경우가 있다.[11] 본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야갤에서 나온 드립이다.[12] 그리고 2019년부터 그는 두산 베어스에서 다른 호세와 함께 하게 되었다(...).[13] 당시 배영수가 얀을 맞히고 껄렁거리는 모션을 취했기 때문에 호세가 아니더라도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을 것이다.[14] 2001년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의 급사로 팀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 사건으로 호세마저 잃으며 롯데는 4위와 불과 1.5게임차의 아쉬운 8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꼴데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기나긴 암흑기'''가 도래한다. 정말 2001년은 롯데 자이언츠에 마가 낀 한해였다.[15] KBO 골든글러브인것 같은데 이 링크의 게시자는 선물받았다고 하고 어느쪽이 맞는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롯데 수석 트레이너의 인터뷰에 따르면, 골든글러브 상은 호세가 사실 잊어버렸거나 도난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골든글러브 사건 이전에도 호세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팬들 호응에 응대해주는 사이 종종 자기 물품을 도난당하기도 했다고. 이 인터뷰에서 수석 트레이너는 골든글러브를 유흥주점에 공짜로 주었거나 선물했다는건 루머라고 일축하였다. 뭐 진실은 호세만이 알겠지만.[16] 다만 이 부분은 다소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정수근이 방송에서 언급한 이야기 중 일부는 걍 허구거나 사실에 허구가 더해져 부풀려진 것도 있기 때문.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같이 뛴 투수 이정훈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으로 보아, 자기 팀 선수들 한정으로는 천사같은 모습을 보였나 보다.[17]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